코로나19로 드러난 교회의 현실 및 대안(1)
박종서(양지평안교회 담임목사)
1. 들어가며
2. 드러난 문제
1) 신화적 환상
2) 정치와 복음의 동일시 현상
3) 열광주의
4) 음모론
5) 스펙타클의 문화의 한계
3. 소결: 드러난 문제들에 대한 정신분석적 견해
4. 대안-통합적 사고
1) 신학적 과제
# 본회퍼의 관점
2) 정신분석적 사고 모델에서 배우기
5. 나가며
1) 늦더라도 천천히 정도(定道)의 길을 가야 한다.
2) 통합적 사고를 갖추어야 한다.
1. 들어가며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폐허의 잔해들이 나뒹군다. 이런 재해를 당한 사람 앞에서 태풍은 깊은 바다 속, 정체된 물을 정화하고 지구 자체를 살리기 위한 자생적 순기능이었다는 통찰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조언이 된다. 문제를 지적하고 그 원인의 뿌리를 찾는 것보다는 우리가 당한 이 재난을 빨리 복구하고 어떻게 이 위기를 회복할 수 있을지를 논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이 지구가 정화를 위해 강력한 태풍으로 몸부림이 필요했듯이 코로나19가 우리 문명에 필요한 귀결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어디 이러한 경고의 싸인(sign)이 코로나19 뿐이겠는가? 수많은 경고가 있었지만 그나마 코로나19는 우리 문명을 잠시 불러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경고도 자본주의의 팽창문명의 방향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도 우리의 문명은 계속해서 낭떠러지로 달려가고 있다.
기독교인들도 하얀 스크린의 차폐막 앞에서 ‘위기가 기회’라는 위안의 말로 안위 하며 어떻게 우리의 콘텐츠를 현대 테크놀로지에 잘 담아내어 이 언텍트 시대를 잘 헤쳐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우리도 절대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눈치다.
그 동안 기독교는 성공과 번영이라는 세상의 목표에 열정을 부어주고 조력했다. 우리의 믿음 또한 세상과 그럭저럭 잘 조화되었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제정된 이래 세상이 기독교에 시비만 걸지 않는다면, 기독교도 세상과 부딪칠 일도 없었고 타협하며 그럭저럭 잘 지내온 셈이다. 그러나 기독교 성직자의 세금문제나 코로나19를 겪는 과정에서 부당한 공격을 받는다고 생각했을 때 기독교가 취한 태도는 마치 함께 동거하던 동료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초대 기독교가 로마에 공식종교로 공인된 이후 중세시대에 누렸던 최고 영광의 지위와 흔적은 아직도 기독교인들의 집단무의식 속에 남아 있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싶은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 모두의 소망이다. 그러나 막상 붙어보니 힘에 겨웠고 시민들도 우리 편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과학만능주의와 이성으로 무장했고 우리는 ‘무의식적 권위주의’와 ‘반 지성’의 ‘신비주의’로 싸웠으니 게임의 결말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굼떠 우리자신도 몰랐고 세상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이것이 코로나19를 통해서 우리가 경험한 것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 깊이 숨어 있는 異敎的인 것들을 우리의 의식 밖으로 끌어올려 새김질해 보고 우리의 상황이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있다.
2. 드러난 문제
1) 신화적 환상
아도르노(T. W. Adorno)와 호크하이머(M. Horkheime)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머의 오디세우스(Odysseus)에 나오는 사이렌 요정신화를 우리문명에서 재해석한다. 항해 도중 반인반조인 사이렌의 노래를 듣는 자는 그 섬으로 끌려들어가 결국 파선하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앞만 보고 노를 젖게 한다.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는 이것을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의 삶과 유비시키며 그들이 사회적 역할로부터 빠져날 수 없음에 비유한다. 오디세우스 역시 사이렌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마스트(master)에 묶인 무력한 상태에서만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오디세우스는 자기포기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묶여 있었기에 자기의 삶을 향유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뱃사공들은 열심히 노를 젓지만 강압적인 노동만 있을 뿐 노동을 향유할 수 없다. 여기서 호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욕망과 억압의 균열이 만들어내는 ‘소외’에 집중한다. 두 대극 사이는 차갑고 투명한 진공상태만 존재한다.
모든 인간의 자아는 모성성과의 신비적 융합이라는 흔적을 갖는다. 이 때문에 인간의 자아는 항상 과거의 위력에 휘둘려 함몰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사이렌은 지나간 과거를 불러내 저항할 수 없는 쾌락을 약속하는 동시에 현실원리의 질서를 파괴하는 힘이다. 요정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사람은 파멸하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자연으로부터 생존을 쟁취한다. 즐겁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약속을 동경하는 자는 결국 과거라는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프로이트(S. Freud)는 인류의 문명은 ‘모성성’, 곧 신화적인 품에서 빠져나와 아버지로부터 오는 초자아의 압박에 순응한 그 터 위에 세워진다고 말한다. 퇴행하여 절대적인 쾌락에 도취된 자는 현실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항상 원초적 욕망의 유혹 앞에 서성거린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문명의 불만’이고 사이렌의 신화가 주는 교훈이다. 오디세우스는 사공들이 귀를 막고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을 것을 명령한다. 살고자 하는 자는 이 명령에 순종하고 되돌아 올 수 없는 유혹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 안에는 욕망과 억압의 갈등, 곧 닫힌 구조만 있지 타협의 공간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