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왜 이런 이야기구조가 목회현장과 자연스럽게 조우되는가이다. 리더는 말씀에 자신을 강하게 묶고 외치지만 성도들은 퇴행하여 유혹의 소리에 귀를 연다. 그들은 강력한 유혹의 소리를 들은 후 다시 귀를 막거나 자신을 마스터에 단단히 묶어야 할 강박적 이유도 갖지 않는다. 함께 열심히 노를 저어 그 유혹의 섬을 지나가야 하지만 귀를 막고 열심히 노를 젓는 사공의 숫자는 지극히 적다. 심지어 성도들은 마스터에 묶여 있는 리더의 밧줄까지 풀어준다. 원초적 욕망으로 퇴행한 무리들에게는 자신들의 욕망에 부응하는 리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리더는 인간의 욕망과 퇴행이 얼마나 유혹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지만 성도들을 제어할 방법을 모른다. 성직자는 성도들에게 매주 눈과 귀를 막고 이 세파를 열심히 노저어갈 것을 명령하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모두가 퇴행하여 귀를 열고 욕망의 소리를 듣는다. 코로나19를 통해 교회 인원과 재정이 줄어들고 교회가 존폐위기의 불안을 겪어야 했던 것은 이러한 신앙에 대한 당연한 귀결이었다. 실제 합동교단에서 3000교회 이상이 교회 문을 닫아야 했다. 코로나19를 당한 성도들의 고난과, 과거 핍박이 극심했던 로마 초대교회를 비교했을 때 오히려 그들은 고난의 때에 신앙이 더 성숙되고, 숨어 모이기를 힘썼지만 이번 코로나19는 오히려 성도들의 쉼의 기회가 되고 교회를 떠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질적 차이를 갖게 된다. 이것은 성도들이 이미 세상 경제논리와 욕망에 길들여지고 카리스마 지도자 아래서 유아적 환상으로 신앙생활한 결과물이다.
그동안 교회는 성도들 스스로 세속적 세계관을 해석하고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기보다 저들이 교회 권위에 순종시키는 일을 가르쳐왔다. 코로나19는 이러한 목회에 한계가 무엇인지를 드러냈다. 교회는 성도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때 세상 욕망에 함몰될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설 수 없도록 유아로 만들고 신화에 매몰되는 성도들로 만든 것이 바로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코로나19를 통해서 그동안 감추어 있었던 이러한 모습, 곧 그동안 우리가 서 있었던 토대가 드러낸 것이다. 양권석은 <코로나19와 함께 해온 1년>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기존교회가 급격히 줄어드는 신자 수와 헌금의 감소, 교회의 관리구조를 지탱해온 인적, 물적 토대가 붕괴할 위기에 처해 있다. 외부로 부터는 바람직한 변화를 선도하기보다는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시대착오적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집단, 반공주의를 포함한 지배적이고 악업적인 문화를 비판하기보다는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집단, 차별과 혐오와 배제의 독단적 이념을 전하는 집단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왜 교회가 이런 상황에 직면한 것일까? 그리스 비극신화(이원적 갈등구조)안에는 ‘십자가’와 ‘성육신’이 없다.(코로나 19에서 성육신의 역할은 거의 간호사와 의사들의 몫이었다) 사실 코로나19는 교회가 ‘십자가의 도(道)’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지만 교회는 정부와 사회적 압력에 발끈하고 헌법을 거론하며 우리의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분주했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의 모든 부조리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올라가셨지만 우리는 ‘가처분신청’을 통해 권리를 찾았다. 결과 얻은 것 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죽어야 사는데 살려고 하다가 많은 이웃을 잃었다.
코로나19는 잘못 살아온 인간의 문명에 그 원인이 있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에 일하고 계시는지 지켜보고 회개하며 열심히 섬기는 일을 했어야 했다. 코로나19는 세상을 환상 속에서 깨우는 해독제였는데 우리는 우리의 신화와 환상으로 세상과 대결했다. 세상은 자신들의 세속적 논리와 과학적 이성으로 우리의 신비적 환상을 깨려고 했고 정작 그들 자신들은 어떤 환상 속에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우리는 복음 때문에 싸웠다고 하지만 사실 신화적 사고로 그들과 대결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이상적으로 걸 맞는 프로테스탄트 번영신학이 이제 수명을 다한 것이 아닌지 우리는 검토해야 한다. 코로나19가 이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