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치와 복음의 동일시 현상
코로나19를 통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현 정부를 좌파와 빨갱이로 규정하며 투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왜 정치문제에 거리를 두지 못하고 극우에 열광하는 것일까? 전광훈의 극우논리는 공산주의가 교회를 박해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사고에서 온다. 이것이 그의 목회전략인지 아니면 그의 술수인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문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운동이 곧 하나님나라를 위한 충성이라는 선전을 믿고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중독성을 띄고 유아적이고 병리적인 그리스도인을 열광케 했다. 공산주의의 유물론적 사고와, 기독교를 종교적 아편으로 보는 비기독교적 사고는 경계해야 하지만 교회가 어려움에 처한 것이 코로나19도 아니고 순전히 공산주의 좌파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이것을 정치적으로 비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정치 참여가 얼마나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지를 사회에 증명하는 것이 된다. 이들은 좌파를 대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기독교는 ‘반공이데올기’로 한국사회 분열에 일조했고 코로나19에서 이러한 열광이 극에 달하게 된다.
보수주의의 석학인 후쿠야마(F. Fukuyama)는 그의 명저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며 맑스처럼 물질적 토대의 분석이 아닌 인간 내부의 억압되어 있는 투모스(thymos, 패기 또는 도덕, 정의)의 관점에서 정치 문제를 논한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가 욕망에 종속되어 이 기개(투모스)를 버리고 ‘붉은 뺨을 가진 야수’가 ‘말종 인간’이 되어가고 있음을 염려한다. 그는 이 투모스를 투쟁과 희생을 요구하고 동물 이상으로 뛰어난 존재로서의 자기증명을 시도하는 인간적 측면이라고 말한다. 민주 사회는 육체적 고통을 맛보지 않게 하기 위해 시민에게 최대의 배려를 주고 시민은 모든 것을 국가가 알아서 해 주기를 원한다.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의 긴장은 물욕에 휩싸여 육체적 욕구를 필사적으로 채우려는 ‘말종 인간’인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군중을 향해 말한다. “이제는 인간이 자신을 위하여 목표를 세워야 할 때다. 이제는 드높은 희망의 싹을 심을 때다.” 짜라투스트라의 연설에 군중은 소리친다. “아! 짜라투스트라여 우리에게 그 ‘말종인간’을 달라! 우리를 그 ‘말종인간’으로 만들어 달라.”
니체(F .W. Nietzsche)에게 최후의 인간, 곧 말종 인간은 패기(thymos)를 잃어버리고 오직 ‘대등욕망’과 ‘원한감정’으로 물질적 번영과 풍요만을 구하는 배부른 돼지 같은 인생을 말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위험이다. 교회가 바로 민주주의가 원하는 이 노선에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원하는 민주주의가 바로 후쿠야마가 말하는 마지막 인간, 욕망에 종속된 인간, 니체가 말하는 ‘말종인간’ 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극우에 쏠린 정치참여가 우리의 욕망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무의식적 환상이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오히려 이 시대는 호크하이머의 주장대로 저들의 정치적 도구가 될 가능성만 더 높아지게 될 것이다. 복음의 길, 특별히 십자가의 길을 가는데 정치의 문제는 전혀 핑계가 될 수 없다.
본회퍼는 정치문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걸핏하면 권세를 가진 사람들에게 맞서는데, 도대체 이런 일을 어찌하여 일어나는가? 그들이 권세를 가진 사람의 잘못과 부당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여기는 순간 그들은 이미 가장 큰 위험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기울여 그 뜻을 이루기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있든, 그들에게 어떤 갈등이 닥치든 그들이 회개와 복종으로 살아남는 것이지, 세상의 권세를 가진 사람을 정당화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롬12:21) 선한 권세냐 악한 권세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