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스펙타클 문화의 한계
에베소서 4장13절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것”을 말씀한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많이 알면 머리가 커져 신앙에 방해가 된다”는 말과 대치된다. 무지한 자로 만들고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것은 성도들의 생명력을 죽이는 것이고 이러한 비자발적 순종의 강요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그들이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었었다면 코로나19가 그들의 신앙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반지성과 대중문화의 기원은 세속문화에 그 뿌리가 있다. 대중들이 몰려가는 곳은 항상 많은 군중들이 모이는 극장이다. 세속은 포스트 코로나와 뉴노멀(new normal)을 내다보며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대책을 간구하지만 기독교는 딱히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향수 외에 다른 길을 찾지도 못하고 있다.
이미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극장문화(최근 이러한 문화는 SNS문화로 전환되고 있다)에 물들어 있고, 넘쳐나는 정보들을 해석하지 못하고, 난무하는 정보들을 여과 없이 받아드리며 길을 잃고 있다. 진리는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스펙타클에 있다고 믿기에 저들은 이미 구경꾼으로 전락해 있는 것이다. 누가 그들을 건져 낼 수 있겠는가? 교회는 이 일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는 잠들게 하고 퇴행의 욕구를 자극하며 신화를 주입하던 ‘이교도적 구조’에 대한 경고이지만 다시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문화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지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
대형 교회에서는 통제를 원하는 지도자와 자유를 반납하고 통제받기를 원하는 성도들 간의 공모가 있을 수 있어 억압적인 공동체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은 신앙 색깔의 통일을 만들어내고 힘 있는 추진력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여기에 합류하지 못하는 성도들은 도태되어 방황한다. 정당한 토론이나 의문 제기를 ‘믿음 없음’이나 ‘불순종’으로 간주하게 될 때, 그들은 방황하게 된다..
엄청난 물량의 투입, 테크놀러지, 영상시시스템 등의 인프라를 구축해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세속적 영상 문화를 교회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수천 만 원씩이나 하는 카메라를 교회 곳곳에 배치하고 ‘전문 테크니션’들을 여러 명 고용해 아무리 좋은 영상을 만들어도 세상문화가 고용하는 회당 출연료 1, 2억씩 하는 유명 엔터테이너를 고용할 수는 없다. 그들은 이미 ‘여신’과 ‘남신’이다. 오히려 고급 카메라에 얼굴이 비추어질 때, 작은 점과 주름살, 심지어 모공까지 자세히 드러나게 되고 나이든 목회자의 경우 치명적인 핸디캡이 된다. 이데올로기만 종교화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문화도 이미 종교화되고 신비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 목사는 신비를 연출하는 엔터테이너가 아니다. 테크놀로지는 세속 문화를 이길 수 없다.
지금까지 ‘극장문화’는 ‘대중목회’를 추구하는 기독교와 잘 조화되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극장 문화는 근대 이후, 상업계급의 출현과 함께 투자와 흥행, 프리마돈나의 출현 등으로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청중은 오직 구경꾼으로서 요동 없이 앉아 감정이입이 되어야 한다. 대중 극장문화는 근대 세속주의와 함께 시작된 인본주의 문화로 기독교에 온전히 부합되는 문화는 아니다. 니체는 상업문화와 함께 출현한 대형 건축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우, 광대, 춤꾼, 음악가, 서정시인들은 유사한 한 종류이다. 그러나 건축가들에게 예술을 요청하는 것은 강력한 의지의 작용이다. 건축은 산을 옮기는 강력한 의지의 도취다. 그것은 권력을 암시하고 긍지, 고난에 대한 승리, 힘에의 의지가 가시화된다. 건축은 설득하고 아첨까지 하며 때로 명령하는 권력에 대한 일종의 웅변술이다. 누구의 마음에 든다는 것을 경멸하는 권력. 더 이상 증거가 필요하지 않는 권력, 쉽사리 응답하지 않는 권력, 자기 주변에 어떤 증인도 있지 않다고 느끼는 권력, 적대자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권력, 이것이 건축이다.
위 글은 “힘의 과다야말로 힘에 대한 증거이고 가치의 전도”라는 그의 말과 의미가 상통한다. 그러나 그가 외적 스펙타클(spectacle)에 압도되는 대중의 무리 그리고 축제극장의 화려함(바그너를 위한 바이로이트의 극장)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호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사슬에 묶인 오디세우스를 후대에 청중이 되어 극장 시트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며 감격스런 외침, 박수갈채로 해방을 만끽하는 극장문화로 비유한다. 사이렌 요정들의 유혹은 과거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도록 만드는 유혹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게 되어 있는 노 젓는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공장 영화관, 그리고 공동체 속에 있는 현대의 노동자와 동일한 리듬 속에 묶여 있는 상태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획일화다. 이들의 무기력은 단지 지배자들의 술수에 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산업 사회의 논리적 귀결이다.
랑시에르(J. Ranciere)의 저서 <무지한 스승>에는 좋은 강의와 스승의 훌륭한 통찰이 학생들을 어떻게 바보로 만들 수 있는지를 추적하며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거리를 어떻게 좁힐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는 다시 <해방된 관객>이라는 저술에서 감정이입에 빠지는 부질없는 구경꾼의 바보 만들기에서 관객을 빼내야 한다고 말한다. 관객은 거리를 취해야 하는 동시에 모든 거리를 동시에 상실해야 한다. 스펙타클은 시각의 지배이고 자기 상실로, 관객들은 관조하면 할수록 그는 더 그 자신을 잃는 것이다. 때문에 스펙타클을 관조하는 것은 도둑맞은 활동이 된다. 기 드보르(Guy Debord)는 스펙타클을 사슬에 묶인 현대사회 악몽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스펙타클의 사회는 오직 잠들려는 욕구만을 표명하는 ‘수면의 수호자’와 같다고 한다.
키에르케고어(S. Kierkegaard)는 이런 무리문화의 수평화의 과정(하향평준화과정)을 추상적인 힘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반성의 작용이고 자신의 ‘사망신고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 셈이며 개인의 파멸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는 무리 가운데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소외’를 벗어나기 위한 대중과의 싸움, 평등이라는 폭정과의 싸움, 피상성, 넌센스, 저열성, 야수성이라는 악동과의 싸움의 어려움은 왕이나 교황과의 싸움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어렵다고 말한다. 하향평준화가 교회의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그것이 복음일 수 있는지는 검토되어야 한다. 미래에도 한국교회가 교회의 맷집을 키우는 스펙타클 문화가 가능할지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