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결: 드러난 문제들에 대한 정신분석적 견해
코로나19를 통해서 드러난 ‘신화적 환상’, ‘정치와 복음의 동일시’, ‘열광주의’, ‘음모론’, ‘스펙타클 문화의 한계’ 등의 밑바닥에는 ‘이항대립적’ 분열사고가 깔려 있다. 인간 내면 안에 공허함이나 비 개성화는 시기심과 공격성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이 공격성을 밖으로 표출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감지될 수 있다. 때문에 무리는 이것을 열광주의에 바꾸어 방어하는 경향을 갖는다. 물론 이렇게 해서 ‘소외’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그들은 더욱더 강렬한 열광과 우울을 반복하게 된다.
멜라니 클라인은 이러한 편집분열이 생후 초기(1-4개월)에 운명적으로 맞게 될 심리구조로 파악했고 이후 엄마와의 좋은 대상관계를 통해 이 분열적 자리에서 빠져 나오는 과정을 임상적 관찰을 통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편집(paranoid)적 자리에서 빠져 나온다고 그 흔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편집증은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을 분열시켜 좋은 것을 나쁨에서 보호하려는 유아의 자연스러운 정신활동이다. 유아의 유약한 정신으로는 두려움을 자신 안에 담아낼 수 없어 투사하고 ‘적’을 외부에 두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기제는 무의식 속에 흔적으로 남아 있어 비록 어른일지라도 성숙과 성화의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퇴행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보편적 분열은 유리피데스의 비극 <이온 Ion>에서 왕비 크레우스와, 왕비의 늙은 노예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고르곤느의 똑같은 피 방울이라는 부적에 대한 대화)
노인) 그 여신의 이중 능력을 어떻게 거기에 담았습니까?
왕비) 칼을 깊게 찔렀지. 그러자 저 깊이 있던 피가 한 방울 솟더군,
노인) 그걸 어디에 쓸 겁니까? 그 효력이 뭡니까?
왕비)이 피는 병을 낫게 하고 힘을 솟게 하지.
노인) 그러면 두 번째 피는 무슨 효력이 있나요? 이건 사람을 죽게 하지, 고르곤느의 뱀독이잖아!
노인) 그 피 두 방을 따로 가지고 왔습니까? 아니면 한데 가지고 왔습니까?
왕비) 따로 가져와야지. 보약과 독약을 섞는 사람이 어디 있나?
좋음과 나쁨을 한곳에 담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유아에게 일어나는 이러한 정신활동은 병리가 아니지만 성인이 이 지점으로 고착될 때는 병리가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정신기제가 구강기에서 시작된다는 것과 이것이 이미 정신병의 초기단계라는 이론을 판사 ‘쉬레버 사례’에서 논증한다.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은 이를 이어 받아 엄마의 젖가슴과 관계되는 구강기 단계에서 공격성이라는 죽음본능의 복잡한 기제를 연구해 정신치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잡아먹고 먹히는 구강기적 특징이 신화화 되는 이유는 이것이 인간 삶의 초기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버지 크로노스가 자식들을 잡아먹고 그의 막내아들 제우스까지 삼키려 했을 때, 제우스는 어머니에 의해 구조된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살부흠모’에 빠지면서 아들은 엄마에게 함입되어 세상으로 나올 수 없는 자기애의 병리에 갇히게 된다. 기독교가 성숙의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당연히 이러한 기제에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 것이고 드러난 5가지 현상이 바로 이러한 정신기제위에서 작동된 것들이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진정한 탄생은 영아가 엄마와 살을 분리하는 사건보다 ‘선과 악’이 한 인격 안에 있음을 인지하는 ‘우울적인 단계’에 이를 때 비로소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문제는 ‘선과 악’을 한 인격 안에 담아내는 것보다 퇴행하여 편집증적 정신기제에 머무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선과 악’에 대한 분열적 구조만 중요하게 되지, 선악에 대한 진실은 뒤로 밀리게 된다. 인간이 ‘선과 악’의 모호성 안에 머물지 못하고 ‘도덕신화’에 빠져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편집증의 사람들에게 적은 싸워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기에 투사된 두려움은 다시 돌아와 그 대상은 적이 되는 환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편집증적인 의식이 항상 집단이나 파벌, 동맹을 형성하는 이유에 대해서 니체는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말한다. 모든 병자나 병약자는 숨 막힐 듯한 불쾌함이나 허약한 감정을 떨쳐 버리려는 갈망에서 본능적으로 무리조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혼자서만 믿고 있는 광기가 아닌가 하는 불안 때문에, 집단에 가담하고 여기서 안정감을 찾고, 신봉자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기듯 자신의 편집증을 편집관에게 위탁하며, 양심에 대한 두려움은 양심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은 ‘편집광’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맡겨버린다. 복잡성의 세계에서 안전감을 느끼게 하고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로 ‘확신’과 ‘이데올로기’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의 체계이다. 죽은 틀에 맞추어 자신을 고립시키거나 축소하는 것은 당장에 안정감을 주지만 현실을 잃어버리는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
소련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했고 스탈린 체제를 직접 체험한 로버트 C. 터커(R. C. Tucker)는 내면이 외면으로 이해되고 인간의 내적 생활이 외적 세계에서 일어난 듯이 경험되고 해석되는 것을 전형적인 신화적 사고의 특징으로 보았다. 그는 칼 맑스(K. Marx)가 복잡한 세계를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라는 두 개의 세계로 축소시켜 자신의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을 사회적 드라마로 투영했다고 보았다. 때문에 그는 인구의 증가, 기술의 성장, 오염의 증가, 그리고 사회적 복잡성의 증대 위기와 상호 관련된 대단히 많은 측면들을 간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선과 악의 이야기, 건설적 힘과 파괴적 힘이 서로 세계를 차지하려는 싸움의 이야기는 도덕적 신화와 비슷한 내용을 갖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부정’이라는 이유로 ‘선과 악’, ‘성과 속’이라는 두 간극 속에 아무런 내용을 갖지 못한다. 때문에 누가 어떤 음모를 가지고 들어와도 속을 준비가 이미 다 되어 있는 상태가 된다. 이들에게는 선과 악을 분별하고 검증하는 능력이 부재하기에 ‘악이 선으로, 선이 악으로 둔갑되는 일은 쉬운 일이 된다. 사이비 지도자들이 ‘진리와 비 진리’를 기묘하게 혼합시켜 제시하면 분별을 못하게 된다. 사이비 ‘기형적 리더’는 현실원리에 기민한 감각을 갖고 주님의 권위와 자신을 동등시하며 자기애적인 공격성으로 ‘자기확신’을 드러낸다. 이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이것이 ‘과대적 병리’인지, 아니면 ‘영웅’인지 구분을 못하게 된다. 그들은 파시즘의 기초가 되는 ‘마조히즘, masochism’과 ‘사디즘, sadism’의 기제를 자유자제로 구사한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공격성은 이렇게 강한 사디즘 앞에 피학적인 무리들로 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