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대안-통합적 사고
1) 신학적 과제
십자가의 도는 ‘자기 부정’이다. ‘자기 부정’은 욕망의 강력한 억압으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부정이 있기 전에 먼저 건강한 자아가 세워져야 한다. 교회는 이것을 돕고 성도들이 얼마나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존재인가를 체험케 해야 한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다. 전도서 3장에서 솔로몬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한 만사에 다 때가 있다고 말한다. 심을 때와 뽑을 때가 있고 세울 때와 헐 때가 있다(전3:1-3).
폴 투르니에(P. Tournier)는 <인간의 자리>라는 저술에서 ‘자기부인’을 요구하는 기독교와 ‘자기주체성’을 강화하려는 일반학문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변증한다. 그는 말하길 의사는 가난한 자들에게 결여된 부요함을 주고, 성직자는 부유한 자들에게 소유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분리시킨다고 말한다. 이 두 역할은 사실상 중첩된다. 줄 수 있으려면 먼저 받아야 하고, 포기할 수 있으려면 먼저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너무 이른 ‘자기부정’의 이유로 ‘자기확장’이나 ‘자기배려’가 큰 죄인 줄 알고 살아가야 한다. 성경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면 죄의식에 빠져 신경증상태가 되고 만다. 자발성이 없는 인위적인 자기부정의 억압은 결국 욕망의 부메랑을 다시 만나게 한다.
우리가 이미 십자가 안에서 죽고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사실(갈2:20)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그 은혜의 경험은 주관적이다. 이것은 한 번의 통찰과 깨달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결단과 시행착오와 연습을 통해 달성되는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L. Newbigin)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진리>에서 선한 파수군은 경계와 인내 모두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인내만 강조되면 졸음과 나태로 내몰리고 즉각성만 강조한다면 현재의 이상적 의무를 무시하는 흥분 상태를 이끌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에서 가장 많이 받는 유혹은 장기적인 관점을 과소평가하고 책임질 수 없는 흥분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성속’ 이원론의 분열, ‘선과 악’의 분열을 해결하는 방법은 근본주의적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변증을 통합적 사고로 세속화되지 않으면서 세상을 긍정하고 어떻게 내 안에 일어나는 악을 통합하는가의 문제이다. 물론 이런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에덴동산 가운데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두 종류의 나무 중(창2:9) 아담은 ‘생명나무’를 선택하지 않고 ‘지식의 나무’를 선택했다. 이것은 인간이 혼적으로 과도한 성장을 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혼은 이 날부터 자유선택을 할 수 있는 독립적인 능력을 가지고 인간에게 활력을 주는 영의 자리를 빼앗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오해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은 타락한 이성이고 이 때문에 ‘반지성적’이 되는 것이 영성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솔로몬은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할 뿐“이라고 했다(전12:12). 최고의 진리인 성경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의 지적 능력으로 주옥같은 서신서 10편 이상을 썼고 모세는 애굽에서 배운 학문으로 ‘모세오경’을 기록했다. 그들은 자신의 지성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사용했지 반지성주의자는 아니었다.
워치만 니(Watchman Nee)는 자연적인 은사, 재주, 인격 및 개성이 완전히 십자가에서 제거된다는 의미에서의 혼 자체가 “십자가의 못 박힘”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여기서 혼의 십자가의 죽음이 날마다 죽음으로 점진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혼적인 것을 잃게 되면 개인적인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혼은 여전히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십자가는 그 타고난 재능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 재능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낙인을 찍으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영광스러운 부활 안에서 그 재능들을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고전2:3-5)라고 했다. 이 말씀은 혼이 언제나 성령님께 종속되어 있게 하고 결코 독립적으로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지 그의 재능을 없애버리는 반지성주의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칼 포퍼(K. R. Popper)도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우리가 지식의 열매를 먹어 천국을 잃어버리고 영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반(反)지성주의나, 부족주의의 영웅시대로 돌아가, 종교재판에, 비밀경찰에, 낭만화된 깡패행위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말한다. 비록 타락한 이성이지만 우리가 가진 이성의 계몽을 변증하면서 주어진 이성을 사용하여 안전과 자유를 위해 미지의 세계,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고린도후서 10장 4절에서 ‘반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몽을 다시 변증하여 주님께 무릎 꿇리라고 말한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무너뜨리고 복종케 할 것이 없는 사람은 변증의 과정 없이 초월로 바로 건너뛰거나 욕망의 불로 뛰어들게 된다. 대부분의 부흥집회가 깨우기만 하고 초자아를 강화시키지만 결국 그들이 다시 욕망에 사로잡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락한 혼의 능력이지만 ‘계몽의 능력’을 다시 변증하는 일을 포기하고 ‘반지성주의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다.
성도들의 눈과 귀는 과학문명의 테크놀로지로 인해 갑자기 열려 버렸다. 우리는 그동안 성도들에게 세상 문화에 대한 '면역주사'에 무관심했고 기독교는 세상문화에 많은 성도들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면역 활동은 편집증적 확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광야와 불을 지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파커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부제: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문학은 불가피하게 정치적이다. 왜? 우리의 비전을 복잡하게 만들고, 소중하게 간직해온 생각들을 뿌리째 뽑아버리며, 독실한 믿음(잘못된 믿음)을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즉 불확실성이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다. 관용의 경계를 긋고 다시 긋도록 강요하면서까지 우리의 이해와 연민의 범위를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는 반지성주의처럼 오해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서 반지성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체감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일은 교회의 시급한 과제이다.
세속과 거룩, 좌와 우, 이성과 감정, 자연과 은총 등의 갈등은 완전하게 해소될 수 없다. 그럼에도 쉽게 포기될 수 없는 과제이다. 갈등 안에는 반드시 정(正)과 반(反)의 반목이 있다. 정⦁반의 토론은 변증을 통해 불안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신앙이 깊어지게 한다. 그러나 언어의 전능성을 믿는 번영신학에서 부정적 사고는 금물이다. 이것의 치명적인 약점은 당장에는 효율적이지만 원시안적 관점에서 의심과 권태가 일어났을 때 해결방법을 찾지 못하고 성도가 그 공동체를 떠나게 되는 것에 있다.
본회퍼의 관점
본회퍼는 “세상을 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을 보지 않고서는 세상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가 되셨고 온 인류는 하나님에 의해 용납되었으며 세상은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그는 갈등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한다.
급진주의는 시간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영원을 미워한다. 급진주의는 인내를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결단을 미워한다. 급진주의는 지혜를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순수성을 미워한다. 급진주의는 중용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불가해한 것을 미워한다. 급진주의는 현실적인 것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말씀을 미워한다.
이 글의 요지는 시간성을 견디어 내면서 결단을 지속해야 하고, 지성을 갖추면서 순수성을 잃지 말아야 하고, 중용과 균형을 갖추면서도 기적을 사모해야 하고, 현실을 받아드리면서도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합적 사고는 칼날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다.
세상은 진멸을 통해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통해 극복된다. 이념, 프로그램, 양심, 의무, 책임 덕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만이 현실과 대면할 수 있고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다시금 보편적인 사랑의 이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실천되었던 하나님의 사랑이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은 현실로부터 탈세상적인 고상한 영혼 속으로 후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