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신분석적 사고 모델에서 배우기
정신분석과 기독교는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다. 그 이유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계몽주의의 산물이고 유물론적이며 근대에서 포스트모던으로 이행하는데 주요 도구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프로이트 정신분석 이론의 두 축 가운데 하나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는(다른 축은 ‘유아성욕’이다)는 그리스 비극신화에서 그 틀을 가져왔고 이 점은 기독교에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억압과 욕망의 갈등구조인 이 헬라적 사상이 일반 사회와 문명뿐 아니라 기독교세계 안에 녹아져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기제가 인간 심리의 한 부분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구조는 인간의 성숙과정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한 국면, 곧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갈등만 다루기에 통합의 과정은 없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프로이트의 후예들에 의해 지속적인 발전과 성취를 이룩했고 지금도 진행형이기에 죽은 학문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포스트모던의 다원적이고 파편적인 가치관이 유행하는 가운데서도 가정을 통한 자녀의 올바른 양육이 하나님의 사역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증명함으로 인간의 ‘분열’과 ‘해체’가 하나님이 청지기 사명으로 주신 가정과 자녀의 양육을 성경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결과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정신분석과 성경말씀은 대척점에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정신분석은 ‘성화할 수 없음’의 원인을 밝히고 해석하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학적 도구로 사용이 가능한 것이다.
정신분석의 핵심 과제는 분열적 인격을 통합하는 것이다. 욕망이 너무 커서 무절제해도, 심하게 억압이 되어도 병리를 갖게 된다는 것이 정신분석적 진단이다. 몸과 정신, 의지와 표상, 욕망과 도덕, 자유와 통제의 두 계기 모두를 존중하며 균형을 찾는 것이 치료의 목적이다. 정신분석은 높은 도덕성이 억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통합적 인격’에서 온다고 본다는 점에서 신학적 사고와 유리되지 않는다. 고전 정신분석은 도덕을 벗어나야 할 강한 초자아로 본다는 점에서 토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정신분석은 ‘억압과 자유’의 균형과 ‘통합’을 다룬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맥락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억압과 금지의 명령은 인격형성에 외상을 주고 경직된 방어구조를 만들어 ‘성화’의 장애물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인간 초기의 건강한 대상 환경은 최적의 좌절을 통해 어려움은 감당할 만한 것으로 받아드리며 자신을 변형시켜 통합적 인격으로 나아가는 도구가 된다. 이러한 사고로 자신의 의지를 제어하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 정신분석의 일이고, 이러한 점은 실천신학적으로도 받아드릴 만한 학문이 될 수 있다.
부모라는 건강한 권위, 자연스러운 담아줌과 의존, 그리고 독립의 과정은 인간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여정이다. 이런 과업을 초기 부모환경에서 경험하지 못한 자는 운명적으로 복음의 일을 수행하는데 장애를 겪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성도들은 성령의 내적 치유를 초월적으로 경험할 수 있지만 그것이 불안전한 이유는 성령의 강압적인 침투, 곧 ‘인격적 참여’의 부재는 인격형성 과정을 생략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이트 후예들은 변형적 내재화(코핫, H. Kohut), 최적의 좌절(위니캇,D, W. Winnicott), 투사적동일시, 편집분열에서 우울적 자리로의 이행(클라인, M. Klein), 담아줌과 담김(비온,W.R.Bion) 등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베타영역(파편화)에서 알파영역(파편의 응집), 개념의 단계로의 이행을 거쳐 성숙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는 ‘모성’과 ‘부성’의 두 축을 중심으로 ‘이상화 대상’을 내면화하면서 원초적인 자아가 점진적으로 발달하는 과정이 동시에 수반된다. 지지와 사랑은 ‘포부’를 주고 포부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목표와 방향은 부성성의 역할이다. 정신분석은 로켓이 발사되기 위해 추진력과 방향성의 두 축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이 두 축의 균형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러나 현대정신분석은 공감이라는 모성적 축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신학은 정확한 이상과 목표에 강조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신학과 정신분석은 함께 협응이 가능하게 된다. 정신분석이 신학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모성성의 목적 없음은 마치 젖 땐 아이가 엄마의 품이 좋아, 엄마의 품 그 자체로 만족을 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무런 책임도 없이 아무 것도 아닌 채로 있을 수 있는 신비한 권리다. 밤의 쉼은 목적없음이고 낮의 활동은 목적있음이다. 이 두 축이 항상 함께 받쳐 주어야 길을 갈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부성의 축인 ‘목적있음이 이끄는 삶’만 있으면 되는 줄 안다. 모성성의 축, 곧 목적없음의 삶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인간은 한 가지 축으로 항해할 수 없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것은 ‘목적 없음이 이끄는 삶’이 선행될 때만 유효한 것이다. 목적없음, 아무 것도 아닌 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거기에 에너지의 인풋(input)이 있게 된다. 목적은 있는데 나아갈 힘이 없거나, 힘은 있는데 목적이 없거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데 다람뒤 쳇바퀴만 돌리고 있다면 두 축의 균형을 생각해 볼 일이다. 인생초기 엄마의 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목적없음’에 상실이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을 채워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인간은 힘이 있을 때, 피안의 세계로 도망가지 않고 현실을 직면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 곧 통합적 사고를 수행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성숙과정을 다루는 ‘현대정신분석이론’은 고전적인 프로이트 정신분석 이론보다 성경적인 내용에 더 잘 부합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