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건(시민사회재단 상임대표)
'과연 한국교회는 사회의 적폐인가'라는 질문은 상당히 자극성 있는 질문이다. 이런 주제를 다룬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의 역할을 상당히 상실했다는 얘기다. 사회의 적폐라고 할 때, 그 적폐란 오랫동안 뿌리가 깊어진 죄(a long-rooted sin)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사회악이란 말인가? 이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설립자인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 요구된다.
‘세상의 소금’을 ‘교회의 소금’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예수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the salt of the earth)’이지 ‘교회의 소금(the salt of the church)’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때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a basket)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장 13절-15절).
여기서 소금이 맛을 잃으면 쓰레기가 되듯, 교회가 사회 속에서 교회다운 기능을 못한다면, 교회는 사람들에게 밟피는 소금처럼 사회적폐의 대상이 된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예수의 가르침인 성서로 돌아가지 않는 크리스천들의 삶에 권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디는 예수의 가르침이 인류가 가진 가르침 중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믿었다. 특히 예수의 “산상수훈”(마5-7장)을 그 중에 최고로 꼽았다. 간디의 언급처럼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과연 한국교회가 성서에 기대어 실천하고 있는가.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종교개혁의 핵심사상도 교회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인데 본 글은 ‘사회 속에서’ 교회의 정체성이란 맥락에서 교회를 분석하고자 한다.
과연 한국교회는 사회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성서에 기대고 있는가? 그렇다면, 다음 질문에 솔직해야 할 것이다. 예수가 교회의 주인가, 세상의 주인가. 크리스천은 예수는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의 주권자라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많을수록 예수가 세상의 주가 된다는 사례들이 많아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 초기 한국교회 리더들이 교육, 의료, 사회복지를 통해 예수가 세상의 주인임을 실천한 것처럼, 오늘의 교회 리더들은 성서에 기댄 정책으로 한국인의 삶의 질을 높인 사례들이 어느 정도일까. 불평등과 부패를 막고, 민주주의(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힘쓴 교회 리더들이 어느 정도일까. 종교사회학자 정재영과 복음주의 신약신학자 김세윤을 통해 한국교회의 현상을 보자.
첫째, 정재영은 한국교회 리더들이 예수를 세상의 주로 인정했는지 진지하게 의심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공간은 그 자체의 논리와 기제에 따라 작동하고 있으며, 여기에 기독교 신앙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기독교 신앙은 식사 전에 기도를 한다든지, 술 담배를 금한다든지 하는 개인의 사사로운 경건 생활의 영역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 뿐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정치인은 조찬기도회는 열심히 하지만 정치판은 정치 논리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 기독교 정신을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기독교 경제인은 아침 경건의 시간은 갖지만, 자본의 논리에 짓눌려 여느 기업인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세금을 탈루하기도 한다. ... 이제까지 한국의 개신교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지나치게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견지해왔다. 곧 교회 안에서의 생활에 일차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일상생활의 영역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 “죄악이 가득하고 썩어 없어질 세상”으로 치부해온 것이 사실이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363-364쪽).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사사화(privatization) 경향은 설교의 주제를 개인의 안위와 행복, 마음의 평안에 대한 내용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종교 활동은 사회 활동의 근거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입신출세나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364-365쪽).
둘째, 김세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실종됐다는 것을 심각하게 지적한다.
한국에서 30년 이상 지속된 군사 독재 기간 동안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민주화 투쟁을 하여 인권이 크게 신장되고 민주적 체제가 설립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의 기간 동안 절대 다수의 보수 교단들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압제자들의 사제 노릇하며 민주화 투쟁을 억압하기에 바빴다. 오늘날 교계의 ‘지도자들’의 행태는 더 악화된 것 같다. 기독교를 과시적으로 표방하는 정치인들, 관료들, 기업가들이 더 늘었으나 그들로 인하여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확대되어 사회가 맑아지고 따듯해지기는커녕, 도리어 민주화가 심각히 후퇴하고, 부정부패가 더 악화되었으며, 불평등 구조가 고착되었고, 갈등이 증폭되어 기독교가 세상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바리새인들같이 경건주의적 소극주의에 빠져서 자신의 몸 하나 정결하게 유지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3쪽).
김세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보다 치유행위에 집착하는 한국교회의 심각한 신학 빈곤이야말로 성서에 기대지 않는 것으로 본다.
성령의 힘을 그저 신비스러운 마력쯤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의 현재적 실현이요 시위(demonstration)로 하신 치유 행위들을 제대로 이해할 리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하신 몇 가지 축사와 육신의 병고 제거의 형태의 치유를 그들의 탁월한 시위성 때문에 클로즈업시키지만, 사실 복음서에서 예수가 가장 많이 하신 치유의 형태는 죄인들을 사탄의 나라에서 불러내어 하나님 나라로 회복시킨 것이다(참조, 막2:17 병행: 눅 15:1-32; 눅 19:1-10 등). 그래서 그들은 오로지 전자의 형태의 치유만 치유로 보고 성령의 힘을 빌어 그것을 행하고자 애쓴다. 그들은 수백만의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죄인 하나,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독재자 하나, 전 세계를 경제공항으로 몰아넣은 월스트리트의 맘몬 우상숭배 탐욕자들 몇, 전 세계의 젊은이들의 영혼을 타락하게 하는 할리우드의 퇴폐문화의 아이콘 몇, 돈 많이 벌기 위해 관리들에게 뇌물 주고 부실 건물이나 발암물질 뿜어내는 공장을 지어 수십, 수백 명이 목숨을 잃게 하는 우리 교회의 장로, 집사 사업가들 몇 등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그리하여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00기도원에서 말기암 환자 수십 명을 안수기도로 치유하는 것보다 더 큰 치유 사역이요 생명 살리기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신학적 사고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9-30쪽).
심지어 한국교회가 선교의 지상명령조차 성서와 달리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에는 관심 없고 오직 영혼 구원만의 편협성을 김세윤은 지적한다.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선교 명령을 ... ‘영혼’의 구원을 얻도록 하는 ‘구령 사업’을 하라는 것으로만 이해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실현하고 확대하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도 포함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회가 자유, 정의, 평화, 환경적⦁문화적 건강 등을 도모하는 일을 하는 것을 두고 교회가 ‘구령 사업’만 해야지 ‘사회참여’, ‘정치참여’, ‘문화운동’ 등을 하는 것은 교회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배격(하는 것이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7쪽).
▶본 글은 필자가 2018년 3월 『휴먼리더스』에 기고한 글을 약간 수정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