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건(시민사회재단 상임대표)
필자는 연재칼럼(1)에서 “과연 한국교회는 사회의 적폐인가?(1)”라는 상당히 자극성 있는 질문을 제기했다. 한국교회는 사회문제를 다룰 때, 과연 성서에 기대고 있는가? 크리스천은 예수를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의 주권자로 고백한다. 예수는 크리스천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the salt of the earth)(마태 5장 13절)”이지, 교회의 소금(the salt of the church)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쓰레기가 되듯, 교회가 사회 속에서 교회다운 기능을 못한다면, 교회는 사람들에게 밟피는 소금처럼 사회 적폐의 대상이 된다. 교회가 많을수록 예수가 세상의 주가 된다는 사례들이 많아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 여기에 한국 크리스천의 고뇌가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렌즈를 통해 예수의 활동을 보면, 그의 활동 무대가 마치 교회인 것처럼 착각이 든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한국교회가 교회의 울타리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인들이 자기 교회에서만 충성하고 사회 속에서 섬김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목사들이 있다. 과연 1세기 예수의 활동무대가 성전이나 회당에만 국한된 것인가? 물론 예수는 성전과 회당을 사용했지만 오히려 성전을 헐라(마가 14장 58절, 요한 2장 19절)고 비판했고, 성전과 회당 지도자들을 가혹할 정도로 비판했다(마태 23장).
예수의 진정한 관심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다. 예수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 집에 갔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삶의 기력을 상실한 여인을 만났다.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에서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 환자를 만났다.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큰 무리를 만났다. 상당수 한국교회와 달리 그는 성전이나 회당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바디메오를 만난 여리고 길가, 회당장 야이로를 만난 곳인 바닷가,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의 맞은편 마을,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 두로지방의 한 집, 가버나움의 집,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즉, 사람들의 삶의 자리가 그의 활동 중심지였다.
예수를 교회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교회공동체는 예수처럼 삶의 자리를 중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리처드 스턴트(Richard Stearns)의 지적처럼, 성경은 1,754쪽의 책이지만, ‘정의와 이웃사랑’에 관해서 2,000 곳이나 언급했다는 것은 이 주제가 성서의 주요 가치임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리처드 스턴스,『구멍난 복음The Hole in Our Gospel』홍종학 옮김, 41-42쪽). 예를 들어, 예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종교의식은 있으나 ‘정의justice와 긍휼mercy’(마 24:23)을 버렸다고 비판했다. 한국교회의 많은 설교내용이나 성경공부가 정의와 이웃사랑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약하다. 심지어 사복음서에 나오는 ‘가난’의 문제를 마음의 가난으로만 해석하는 영지주의 목사들도 있다. 그러니 크리스천 시민운동가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후원은 기대하기 어렵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많은 교회 리더들이 현대판 영지주의(gnosticism)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경계하는 이단은 영지주의인데, 적지 않은 한국교회 리더들이 현대판 영지주의에 기댄 것은 아닐까. 영은 거룩하고 육은 더럽다는 생각이나 교회는 거룩하고 세속은 더럽다는 것 역시 영지주의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차이를 기능직이 아니라 신분직으로 보는 것도 현대판 유사 영지주의이다. 개인구원과 같은 영혼구원에만 집착하면서 이웃사랑은 구호에 불과한 것도 같은 현상 아닐까. 중대형교회는 성공한 교회이고 미자립교회는 실패한 교회로 보는 것과 자기 교단만 우월하고 남의 교단을 무시하는 신학생들의 태도도 유사 현상일 것이다. 교인들이 교회 밖에서 기독교시민활동을 하면 눈 밖에 난다는 얘기도 현대판 유사 영지주의 현상이다.
그러니 현실사회 속에서 교회의 가치(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은 이상할 정도로 빈약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면, 역대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부동산정책을 통해 부자를 더욱 부자로 만들고, 서민을 삶의 절벽으로 내몰고 있는 현실에 대해 교회 리더십이 심각하게 우려한 성명서가 몇 편 있을까. 정부가 양극화의 주범임을 이준구(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의 다음과 같은 글이 있어도 교회 리더십은 역대 정부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잘 보이지 않는다.
지난 50여 년의 기간 동안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정부가 꺼내든 카드는 부동산시장 부양책이었고, 그때마다 주택가격은 수직상승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주택 가격의 급등은 집 없는 서민으로부터 내 집 마련의 꿈을 앗아가는 결과를 가져올 뿐 아니라, 전월세 가격의 동반 상승을 가져와 이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이미 몇 채씩의 주택을 사재고 있는 부유층은 속으론 쾌재를 부를지 몰라도, 남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수많은 서민들의 한숨 소리는 나날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이준구,『누가 내 집 마련의 꿈을 빼앗아 갔는가?』87~88쪽)
그 외 공정사회, 신뢰사회에 대한 관심은 먼 얘기 아닌가. 교회가 하나님이 준 친환경 보호를 주도한다는 것 또한 그렇다. 스타필드와 같은 초대형마트로 인한 지역경제의 위기 내지 소상공인의 허약해진 경제생태계가 고민의 대상일까. 교회 울타리 안에서의 신앙생활이다보니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는 예수의 질문에 답할 수 있나. 예수가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의 주라고 진정 고백한다면, 정의사회, 양극화해소, 공공성회복 등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교회의 주요 과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강조한 성서에 천착해야 할 한국교회가 오히려 성서를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밟피는 맛을 잃은 소금이라면, 한국교회는 사회의 적폐일 것이다. 이런 적폐를 넘어서려면, 최소한 네 가지는 해결해야 할 선결조건이다. 첫째, 안보프레임 전사로서의 한국 교회상은 극복해야 한다. 둘째, 자본주의 전위대로서의 한국교회상은 극복해야 한다. 셋째, 한국교회의 잘못된 권위주의는 극복해야 한다. 넷째,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사회의 중심에서 실천으로 제시해야 한다.
I. 안보프레임 전사로서의 한국교회상은 극복해야
한국사회가 절벽사회로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맞섬의 정신이 없다면, 한국교회는 예수를 세상의 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의 관점에서 사회 적폐를 경고하고, 국민을 패거리 정치로 분열시키고, 심지어 약탈 사회로 이끄는 정치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착한 행실 중의 하나이며 때로는 십자가의 길(마태 16장 24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 리더들이 사회의 근본 뿌리인 정의(justice)가 흔들이고, 거짓말이 난무하고, 약탈사회의 고위험을 직시하지 않고, 안보 선동에 휘말린다면 이는 비상식이다. 믿지 않는 자의 선동에 이끌린 한국교회의 리더십을 보자. 2003년 어느 날 저녁, 종로 5가 기독교연합회관에 목사들이 모여든 강단에서 조갑제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면서 한 자연인이자 대한민국 국민으로 교회를 향해 성서적인 사명감을 충동했다는 김지방의 지적은 음미할 만하다. 그가 요약한 조갑제의 말은 이렇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공산주의는 기독교의 적이다. 현재 정권은 그런 공산주의와 결탁하고 있다. 공산주의와 맞서야 할 우파, 우익에게는 지금 힘이 없다. 정치적 힘도 없고 금전적인 힘도 없다. 교회에는 힘이 있다. 금전적인 힘도 있고, 수십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도 있다. 교회가 나서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김지방,『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 116쪽).
조갑제가 어떤 성서의 근거로 적폐의 중심인 패거리 정치에 한국교회를 동원하고, 한국교회를 극우 진영의 들러리로 만들었을까. 한국사를 보자. 조선을 몰락시킨 것이 패거리 정치의 폐해 아닌가. 한기총은 공산주의의 심각성뿐만 아니라 파당정치의 폐해를 균형감 있게 경고해서 한국사회와 한국정치의 평형수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기총은 조갑제를 연사로 초청한 이유가 어떤 성경의 원리에 기댄 것인지 크리스천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당시 한기총은 한국교회를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는 사회악의 도구로 만든 셈이다.
매카시의 안보프레임은 역사상 소크라테스 재판에서도 나타난다. 31개 그리스 도시국가연합이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도시국가의 주도권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전쟁은 펠로폰네소스전쟁(431BC~404BC)이다. 여기서 스파르타가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한 아테네의 상당한 시민들은 전 재산을 잃게 되고 자살을 하거나 망명을 한다. 스파르타는 소크라테스를 포함 아테네인들 3천명에게만 스파르타 시민권이 주어진다. 얼마 후 아테네는 해방된다. 해방의 조건은 스파르타의 부역자 노릇을 한 아테네인들을 징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부역자 척결은 인간사 아닌가. 아테네 지도부는 전쟁 패배의 원인을 논한 후 소크라테스를 고발한다. 아테네인들은 신들의 거주지인 올림포스 신전을 중심으로 결집했는데 소크라테스가 이를 방해했다는 것이 죄목이다. 소크라테스는 안보프레임의 걸림돌이 된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에게 다이몬, 즉 인간 내면의 소리 또는 양심의 소리를 일깨운 것이 문제였다. 안보가 청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자 전부인데 그가 청년의 양심을 일깨웠으니 아테네인들은 그에게 사형언도를 내렸고 그는 독배를 마셨다. 양심을 일깨운 것이 청년 타락이라는 아테네인들의 안보 프레임은 오늘에 와서도 소름이 돋는 이야기이다.
어느 시대나 권력자들의 음모론에는 반공 프레임이 있는 듯하다. 전쟁의 후유증이 있었지만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에게 가르친 양심의 교육이 국익에 해가 된 셈이다. 인류 보편가치인 양심과 국가의 특수가치인 안보는 대립이 아니라 상호 보완관계인데 극우파는 이를 무시하고 안보가 전부인 듯하다. 이는 당시 아테네 지도부의 시각이 한국의 극우 시각과 겹치는 부분이다. 국가의 핵심가치가 사회정의임에도 매카시즘과 같이 안보프레임으로만 사회를 본다면, 이는 극우의 시각이지 성서의 시각일 수 없다. 예를 들어, 대통령으로서 박근혜가 정의를 무시하고 헌법을 어겼다면, 이에 대한 책임을 진지하게 묻는 것이 기독교의 가치이다. 그가 이명박 대통령보다 덜 부패했다는 식의 발언이나, 심지어 2007년 5월 제19대 대선에서 유력 대통령 후보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한국은 빨갱이 나라가 된다는 식의 근거 없는 무책임한 말을 한다면, 그는 무늬만 기독교 리더이거나 극우파일 것이다. 만일 그런 극우주의자가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배심원이었다면, 청년의 양심을 일깨운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판결했을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안보 검증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 정부든 정의가 사회의 토대다. 그런데 교회 리더들이 안보에는 목숨을 걸면서, 성서의 관심인 사회정의에는 왜 상당히 무관심할까. 오늘의 상황에서 안보와 사회정의는 보완관계인데 극우파는 안보를 절대시한다. 그러나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안보가 아니라 사회정의의 문제다. 대선 당시 태극기집회를 이끈 주도층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한국을 북한에 받칠 인물로 인식하고 반 촛불집회를 이끌었다. 교회 리더들은 진영논리의 전선구축으로 교인들을 우매하게, 한국사회를 더욱 피폐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계속)
▶본 글은 필자가 2018년 4월『휴먼리더스』에 기고한 글을 약간 수정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