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건(시민사회재단 상임대표)
II. 한국교회는 자본주의 전위대(Vanguard)를 넘어서야
1. 성장지상주의는 교회 본질과 무관
“사람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느니라. 그러나 ‘그것’만 사는 자는 이를 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느니라.”(마르틴 부버, 『나와 너』 김천배 역 53쪽)라는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핵심은 참 인간이다. 즉, 사람이란 ‘소유’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소유’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참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본주의의 주인은 자본이고 민주주의의 주인은 사람인데 사람이 자본의 노예일 수 없지 않나? 한국교회는 사람이 자본의 노예가 된 탈인간사회를 외면하고, 소유지향 사회에 대해 침묵한다면 어쩌면 소유지상주의의 공범이 될 것이다. 박영돈은 교회의 성장지상주의를 광기로 표현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성장 지상주의’라는 광기 어린 비전 추구에 매진한 데서 비롯한 무수한 일탈현상으로 인해 교회의 이미지가 이렇게까지 손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박영돈,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 25쪽).
2013년 4월 “대형교회, 그 신화를 넘어서!”라는 포럼에서 박영돈은 박영신에 기대어 “1960년대 이후 군사정권이 주도한 경제개발 정책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성장 지상주의 가치관이 교회에도 그대로 유입되었”음을 비판했다(박영돈, 36쪽).
교회가 ‘성장 제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하면서 ‘성장’이라는 가치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대신 하나님은 성장이라는 우상을 돕는 존재로 전락한 ‘성장의 혼합 종교’가 됐다는 것이다(박영돈, 37쪽).
홍정길은 “CBS<크리스천 NOW>에 출현하여 자신의 40년 목회 생활을 회고하면서 대형 교회를 본으로 삼아 성장주의를 추구해 온 것을 후회”(박영돈, 24쪽)한다고 고백했다.
교회 크기(소유지향)가 교회 본질(존재지향)일 수 있나?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교인들 간의 소외현상은 깊어지고 있다. ‘사랑의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한 교인의 고백은 큰 교회에서의 공동체 체험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고백하고 있다.
너무도 아쉬운 점은 옥 목사가 대형 교회가 교회론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방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 개혁 정신으로 투철했던 옥 목사가 유독 대형화에 대해서만은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앙의 후손들에게 참으로 개혁된 아름다운 교회를 물려주는데 실패한 것이 안타깝다. ... 대형화는 그에게 성공한 목사라는 계급장을 달아 주었고 그 유명세를 입고 그는 개혁적인 목사의 포즈까지 멋지게 취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로 존경받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동안 취해 온 개혁적 목사라는 제스처를 접고 몇천억 원짜리 교회 건물 건축을 교인들에게 독려하는 일에 참여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보임으로써 한국교회를 크게 실망시켰다. ... 옥 목사가 교회론적인 확신을 결행하지 못한 우유부단함이 결국 무한 대형화의 비극을 낳는 밑거름을 제공한 셈이다(박영돈, 22-24쪽).
대형교회가 마치 목회 성공의 증거라는 인식은 교회론의 탈선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박영돈은 1970-80년대에 나타난 많은 대형교회가 사회의 빛을 상실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자체 교회 몸집 불리기에만 매진하지 않고 이 사회의 빛이 되는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데 주력했다면, 지금의 한국교회 상황은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박영돈, 21쪽).
2. 경제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나야
미국의 민주주의는 기득권에 의한 경제 불평등을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한국 역시 동일한 상황이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1930년대 미국 민주주의 사회에서 경제 불평등을 적나라하게 체험하면서, 민주주의가 모든 집단의 이익을 고루 반영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특권계급의 이익을 월등히 반영한다고 보았다(전재성, 『정치는 도덕적인가』 172쪽).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미국은 고소득자들에게는 기회의 땅이고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행의 땅인 듯하다”며 미국의 이기주의 문화확산을 우려했다(제러미 리프킨, 『유러피언 드림』 이원기 옮김 58쪽). 또 니버는 경제 지배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전체 사회의 이익과 일치시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자신이 속한 계급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기제를 만들어냄으로써 집단이기주의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전재성, 174쪽). 또 패자가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 기존의 지배계급처럼 자신의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이익과 동일시하고 이를 합리화하는 함정에 빠진다(전재성, 178쪽)는 니버의 지적은 그 당시나 오늘이나 유효하다.
자체 내에 자정능력이 있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정당화한 철학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지배층인 부르주아(자본가)의 기만을 강화하는 철학이라고 니버는 비판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이기심을 견제하고 사회복지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정치체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발전은 자동으로 이익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조정과 타협, 양보로 가능하다는 것이다(전재성, 202쪽). 그래서 민주주의는 “경쟁하는 집단 간의 이해를 조정하고 균형을 잡는 문제에 가장 좋은 정치적 해법”을 제공할 수 있는 체제(전재성, 203쪽)로 니버는 보고 있다.
경제 권력은 사회권력, 정치권력의 견제장치로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 니버의 시각이다. 니버는 『시대 징조의 분별』에서
현대의 기술은 경제의 힘을 집중화했으며, 봉건 농경사회의 정적 경제의 불의를 기술문명의 동적 불의로 바꾸었다. ... 경제의 힘이 효율성 있는 사회적, 정치적 제약 아래 놓이지 않으면, 서구 문명의 본질을 붕괴시킬 시점까지 일반 사람들의 안전을 파괴할 것이다(고범서, 『라인홀드 니버의 생애와 사상』 463쪽).
이와 같은 막강한 경제력은 일부 법조계와 결탁해 한국의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가속화 하는 현상에서 실감난다. 그러나 경제 불평등을 담아내는 불의한 사회구조는 법 제정을 통해서만 변화될 수 있다. 존 스타트(John Stott)는 마틴 루터 킹의 글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마틴 루터 킹은 행동을 제어할 법의 영역을 중시하고 있다.
도덕은 법으로 정할 수 없지만 행동은 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 사법적 판결이 마음을 바꿀 수 없을지 모르지만, 무자비한 사람을 제어할 수는 있다(존 스타트, 『살아있는 교회』 161쪽).
물론 법 제정의 중요성이 도덕폐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본회퍼(Bonhoeffer)는 영향력 있는 자에게 도덕의무를 진지하게 부여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굶주리는 자에게는 빵이 필요하고, 노숙자에게는 집이 필요하고, 권리를 빼앗긴 자에게는 정의가 필요하고, 고독한 자에게는 사귐이 필요하고, 방종에 빠진 자에게는 질서가 필요로 하고, 노예에게는 자유가 필요하다(마 25:31-46). 굶주리는 자를 굶주리게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본회퍼, 『윤리학』 손규태 외 2인 옮김 186쪽).
3. 무너진 가격체계를 바로 세우도록 교회가 힘써야
한국사회가 절벽사회, 사기사회, 헬(hell)조선사회로 변한 것은 정부의 적극 개입에 의한 부동산 가격 폭등이 크게 작용했다. 정부가 만든 결과물은 한국사회의 비극인 무너진 가격체계다. 약간의 통계 차이는 있지만 대략 60년 동안 도시근로자의 월급이 약 20배 상승할 때, 물가는 60배 이상, 부동산은 5,000배 정도 상승했고, 한국은 0.5 퍼센트(10만 가구)의 부동산 부자들의 왕국이 되었고, 무주택 841만 가구는 헬조선사회에 직면하고 있다. 파이낸셜 뉴스에 의하면, 한국 땅값이 1960년대 중반과 비교해 3천배 이상 오른 것으로 한국은행이 분석했다(파이낸셜뉴스 2015.11.16).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의하면, 1964년부터 가격을 추산해 본 결과, 2015년 기준 국내 땅값은 총 8,449조원으로 51년간 약 5,000배 뛰었고, 국유지를 제외한 민유지만 6,704조원으로 3,943배 상승했다. 같은 기간에 80kg 쌀값은 3,470원에서 15만 7029원으로 45.2배, 휘발유 값은 리터당 23원 65전에서 1,510원 4전으로 62.8배 상승했다(경향신문 2017.3.15.). 땅값 3,943배 상승, 휘발유 가격 63배, 월급 15배 정도 상승했다. “주택 공급량이 증가해도 투기적 수요가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면 주택가격 급등을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준구, 『누가 내 집 마련의 꿈을 빼앗아 갔는가?』 252쪽)인데 정부는 “임대사업자로 등록된 사람에게 천문학적 규모의 세제상 특혜를 제공하는 정책(이준구, 255쪽)”을 써 ‘핵폭탄급 투기 조장책(이준구, 256쪽)’을 유도했고 ‘부동산 투기에 꽃길을 깔아(이준구, 225쪽)’ 주었다는 것이다. 땅값이 오르면, 집값이 상승하고, 주거 세입자, 자영업 임차인들은 임대 지옥의 삶으로 떨어졌다. 또 무주택자의 내 집 마련 꿈은 무지개처럼 도달할 수 없는 물거품이 돼버렸다. 게다가 다주택 소유주들은 쉽게 은행 대출을 통해 부를 가파르게 극대화하고 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한 채가 1978년 300만원에서 현 시세 19억 원이다 보니 이런 가파른 널뛰기 가격체계는 사회전반으로 확대되어 가격 약탈 현상까지 조장하고 있다. 같은 직종인데 10배 이상의 월급 차이도 당연한 현상이다. 다수의 서민과 젊은이들에게 남은 것은 절망과 체념이다. 이런 불평등을 방관한 정치인들에 대한 깊은 냉소, 절벽사회에 대한 분노가 박근혜 탄핵의 한 동력이기도 했다. 부동산 투기로 무너진 가격체계가 극단의 양극화를 만들고, 절벽사회를 만들고, 자살률이 높였지만 이런 구조악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교회의 주요 역할 중의 하나다. 교회는 앞서 언급한 이준구 명예교수의 고언뿐만 아니라 아래의 칼런더, 에커로프와 실러의 통찰과 같은 진실에 기댄 메시지를 생산해야 할 것이다.
데이비드 칼런더 David Colander가 <경제학자들은 어떻게 실수를 저질렀나 How the Economists Got it Wrong>라는 논문에서 “우리는 실제보다 많은 것을 이해하는 척한다. 학계 경제학자들의 주류는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한 복잡한 체계를 이해하는 척했고, 일부는 실제로 자신이 이해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사고와 주장을 겸손하게 표현하지 못했다(하비 콕스, 『신이 된 시장』 유강은 옮김 44쪽).”는 것이다.
조지 에커로프 George Akerlof와 로버트 실러 Robert Shiller는 <피싱의 경제학 Phishing for Phools: The Ecomonics of Manipulation and Deceit>에서 “‘시장’은 모기지, 신용카드, 터무니없는 ‘중개 수수료’를 붙인 부동산 판매 등 마케팅의 속임수를 폭로하고 억제하기는커녕 그것이 필요한 정도까지 부추긴다는 것이다(하비 콕스, 99쪽).” “이들은 정보를 과장하거나 날조와 눈속임에 익숙하다. 왜냐하면 소비자는 충동과 환상, 자기기만에 쉽게 조종되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소망을 진정한 욕구라는 허위인식으로 바꾼다. 홍보부가 없으면 현대 기업의 거대한 기구 전체가 멈춰 서고 말 것이다. 에커로프와 실러는 ‘광고 회사는 우리의 약점을 어떻게 집중할지 발견한다.’고 설명한다(하비 콕스, 101쪽).” 결국 “이윤을 얻기 위해 약하고 무지하고 취약한 사람을 등쳐 먹는 것이다(하비 콕스, 102쪽).”
4. 이러한 아픈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의 리더들은 어떻게 책임을 실현할 것인가?
과연 한국교회 리더들은 돈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에 진지할까? 박득훈은 그렇지 않다는 것에 깊은 우려가 있다.
한국교회는 예수와는 따로 노는, 그래서 자기들만의 열정과 환상에 사로잡힌 종교적 마니아 집단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교회 담임목사직 세습, 목회자의 재정 비리, 교회 직분의 실질적 매매, 개교회주의적 물량적 성장주의, 교회의 기득권 세력과의 결탁, 그에 따른 불의한 사회구조에 대한 암묵적 지지 혹은 노골적 옹호 등을 들 수 있다. ...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가 아무리 열심히 봉사한다 한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의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데 있다. 본질적 부패를 감추는 포장용 혹은 정당화하는 생색내기로 보는 정도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교회가 입만 열면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맘몬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강영안 외 20인,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 152-153쪽).
일부 교회 리더들은 장사치로 변했다. 박득훈은 전 미상원의회 목사였던 리처드 헬버슨의 글을 인용해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세계교회사의 슬픈 변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처음에 교회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사람들의 교제 모임이었다. 그러나 그 후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하여 철학이 되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으로 넘어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강영안 외 20인, 155쪽).
이에 맞섬의 정신을 가진 교회 리더들 중에 종교개혁 전통인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성이 일고 있다. 자기 입맛에 맞는 각색된 성서가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성서 말이다. 박득훈은 짐 윌리스가 성서에서 발견한 사실을 하나의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윌리스가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 들어가 1학년 때 친구들과 특별한 목적으로 신구약을 정독하기로 했고 그 평가는 다음과 같다.
가난한 사람, 부와 가난, 불의와 억압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책임을 언급한 모든 구절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찾아보니 수천 구절에 이르러 구약에서는 우상숭배 다음으로 많았는데 이 둘은 서로 연관되는 경우가 많았다. 신약 전체로 보면 1/16이 가난한 사람들이나 돈 혹은 맘몬에 관한 말씀이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1/10,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1/7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들 중 누구도 그때까지 자신들이 자란 교회에서 그와 관련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강영안 외 20인, 158쪽).
박득훈은 또는 제8계명을 통한 청지기 사상을 제시했는데 그의 주장은 합리스러운 대안이 된다.
개인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사유재산권 사상과 싸워 청지기 사상을 늘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 도적질 하지 말라는 제8계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유재산권을 보호하는 계명이 아니다. ... 희년이 돌아왔는데도 추가로 소유하게 된 땅을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그 땅을 아무리 적법하게 획득했다 할지라도 남의 땅을 도적질한 게 된다. 제8계명의 근본 취지는, 누즈(R. Gnuse)가 잘 간파한 것처럼,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부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해주는 데 있다(강영안 외 20인, 168쪽).
한국교회는 또한 존 스타트가 인용한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의 충고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비회원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협동사회다”(존 스타트, 『살아 있는 교회』 신현기 옮김 59-60쪽). 존 스타트는 또한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Robert N. Bellah)를 인용하면서 구성원의 2퍼센트가 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정의롭고 친절한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품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소집단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한 문화의 질은 그 구성원의 2퍼센트가 새로운 비전을 가질 때 변화될 수 있다(존 스타트, 163쪽).
로버트 벨라가 말하는 그 구성원의 2퍼센트는 한국교회 리더들에게 먼 이야기일 수 없다. 한국교회 리더들은 성서 세계와 오늘의 지역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장을 열고, 혁신된 소집단을 통해 경제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기득권을 위한, 기득권에 의한, 기득권의 정부가 만든 무너진 가격체계를 바로 세워 나가는 것이 자본주의 전위대로서의 한국교회를 넘어서는 성숙한 교회 리더들의 모습 아닐까.(계속)
▶본 글은 필자가 2018년 5월『휴먼리더스』에 기고한 글을 수정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