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13일간의 선거운동을 한 각 후보와 지원자들의 피나는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선거는 유권자 시민들의 축제여야 하는 데 이번 선거가 시민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힌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타이타닉호(the Titanic) 침몰 사건이다. 1912년 4월 10일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미국 뉴욕으로 가던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처녀 항해를 했다. 첫 출항인 초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보여주려는 과시욕은 빙산의 위험경고를 무시하고 속력을 냈다. 4일 후(4월 14일) 밤 11시 45분 빙산에 부딪치고 말았다. 배는 결국 새벽 2시 22분에 가라앉았다. 3시간 37분 만에 2천207명의 승선자 중 1천503명이 희생된 사고였다.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타이타닉호 침몰을 통해 얻는 감동 중의 하나는 극한 상황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인간애(人間愛)와 인간의 지나친 욕망이다.
첫째, 타이타닉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선장의 인간애다. 선장 에드워드 존 스미스는 배가 침몰위기에 빠지자 승객 중에서 어린이, 여자, 남자 순으로 탈출하도록 했다. 총으로 공포를 쏘면서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질서를 유지하게 했다. 그 후 자신은 배와 운명을 함께 한 책임감과 직업의식을 보여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줬다. 실제로 그의 고향 영국 리치필드에 스미스 선장의 동상이 있는데, 동판에 “영국인답게 행동하라(Be British)”는 말을 새겨 추모한다. 이태원 참사, 세월호 참사, 가습기살균제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에서 그 당시 핵심 권력가들에게서 책임감 있는 인간애를 확인할 수 있을까?
둘째,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보여준 진정한 인간애가 녹아 있는 힘 있는 자들의 삶이 감동이다. 이계안의 ‘누가 칼레의 시민이 될 것인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나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작품이 지금도 고전인 것은 진정한 시민됨의 본질이 무엇인지, 돈으로만 평가되는 사회가 문제라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작가들의 작품처럼, 39세 일등 항해사 머독(William Murdoch)은 풀리지 않는 구명보트를 풀어 사람들을 구하고, 자신의 구명조끼마저 남에게 벗어주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다. 또 철강 사업으로 억만장자가 된 스위스 출신 미국인 벤자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은 배가 침몰할 것으로 알자, 그는 47세 나이에 구명조끼를 거부하고 턱시도로 갈아입고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유명한 자선가이자 뉴욕 맨하탄 중심에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한 67세 국회의원 스트라우스(Straus)는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고 그 부인은 구명보트에 타라는 권유를 두 번이나 받았으나 이를 뿌리치고 남편과 마지막 순간을 같이했다. 그 대신 하인에게 그 자리를 양보했고, 입고 있던 모피코트마저 건네주었다. 34세 월리스 하틀리(Wallace Hartley)가 이끄는 8인조 악단은 위기의 순간에 음악 연주로 공포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들의 행동이야말로 아름답고 존경받는 사회지도층의 모습 아닌가? 타이타닉호 침몰 과정에서 어린이와 여성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들의 목숨을 버린 부유층의 값진 유산 때문에 오늘의 미국인들이 이런 부유층을 존경하는 것은 아닐까. 목숨 걸고 건전한 시민의식을 지켰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리더십을 인정한 것이다.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억압과 군림이 아닌 자기희생의 인간애를 역사에 남긴 셈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일부 힘 있는 자의 모습을 보면, 인간애가 녹아진 건전한 시민의식의 실현보다 사익과 위협 정치로 나아가는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셋째, 인간의 지나친 욕망이다. 과시욕은 인간애의 실현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면 안 된다. 타이타닉호의 리더들은 경험자들의 경고를 무시했다. 사고 당일(4/14) 타이타닉호는 다른 선박들과의 무선통신으로 빙산이 돌아다닌다는 6통의 경고를 받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경험을 망각하면 낭패를 본다. 역사란 경험의 축적물이다. 단채 신채호, 윈스턴 처칠, 조지 산타야나는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낭패를 보지 않으려면, 경험이 녹아 있는 현장정치가 중요하다. 특히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태도는 역사를 통해 볼 때, 어리석은 행동이다. 고종이 실패한 임금으로 역사에 남은 것은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에 개화 방향은 잘 잡았으나 함께 일할 개혁세력을 제거한 것이 화근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고종은 김옥균 중심의 급진개화파 세력, 김홍집 중심의 온건개화파 세력, 시민세력인 만민공동회와 의병세력을 제거했다. 남은 것은 송병준 중심의 일진회와 마지막 당수인 이완용 중심의 노론세력인 이 두 친일파에 의해 고종 자신은 왕위와 나라마져 빼앗겼다. 국회에서 사라진 토론문화, 양평고속도로 사익 지원 의혹, 채수근 상병의 억울한 죽음과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 징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반문하는 이들과 대화의 장을 펼치는 것이 정치이며 상식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