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평안교회 담임목사>
과거에 수건돌리기 게임이 있었다. 원형을 이룬 게임참여자의 등 뒤에 수건이 놓이면 술래가 되고 처음 술래에 대한 추격과 도망이 이루어진다. 추격에 실패한 술래는 다시 수건을 다른 사람의 등 뒤에 살짝 떨어트린다. 일종의 불안 돌리기 게임이다. 문제는 인간 정신 안에 있는 불안을 다른 사람에게 던지거나 비워낼 때 놀이의 요소는 사라지고 상대는 악마가 된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미움과 증오를 전이시키며 분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엄마의 자궁 바깥이 자궁과 같은 안전한 접촉막으로 보호되지 않는다면 죽음에 대한 불안, 곧 멸절불안을 갖게 된다. 이 과정을 잘 통과하면 불안의 원인을 외부로 인식하는 박해불안의 시기를 맞는다. 박해불안 안에는 ‘탓’과 ‘원망’이 들어 있다. 박해불안은 불안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성찰하는 우울불안으로 발달해야 하고 이것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엄마의 따뜻한 눈길과 목소리, 엄마가 불안을 달래며 두드려주었던 부드러운 손길, 엄마가 불어주었던 자장가들이 내면화될 때 이루어진다. 나이가 들면 그 엄마의 모성이 하나님 아버지로 대체된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갈등은 보수가 진보의 함정에, 또는 진보가 보수의 함정에 또는 서로가 서로를 이 함정에 끌어당긴 것일 수 있다. 어느 쪽이 먼저인가를 따지기 전에 이러한 ‘함정게임’도 게임의 ‘룰’안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을 받아드려야 한다. 게임은 룰에서 벗어나면 실격처리된다. 탄핵은 상대가 원인을 제공했느냐 아니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룰에서 벗어났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다. 헌법 위반 여부의 중대성이 핵심인 것이다. 좌·우, 진보·보수의 문제는 이 문제를 선결한 후에 다루어져야 한다. 여론전으로 게임의 룰을 부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가 불안을 담아내지 못하면 그 불안은 국민에게 전이된다. 이때, 국민들은 불안을 누군가에게 비워야할 악마가 필요하고 그들의 불안을 달래줄 선동가를 찾게 된다. 이때 선동가의 말은 진실일 필요가 없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환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충동적이고 쉽게 열광에 빠지고 거짓을 진실로 확신한다. 이 모든 것들이 비이성적, 비언어적 수준에서, 아직 정신화되지 못한 감각본능 안에서 이루어진다. 나치주의는 이런 불안 전이 과정에서 탄생했고 이러한 정치적 불안이 600만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것이다.
기독교는 불안을 달래는 종교지 불안을 쏟아내는 종교가 아니다. 불안을 피해 교회로 달려오는 성도들에게 더 큰 불안을 주입해서 거리나 광장으로 뛰어나가게 하는 것은 기독교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작금의 기독교는 불안을 쏟아내고 폭력을 선동한다. 교회는 다른 사람의 불안을 담아, 소화해 낸 좋은 것을 돌려주는 곳이다. 저항이 필요하지만 교회가 어느 한 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칼빈(J, Calvin)은 비그리스도인들의 심성이 비록 부패하기는 했지만 그들도 사회정의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기독교강요』 3권14장3절) C.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에서 성경 진리를 애국심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삼으며 자신들의 혐오스런 행동들을 정당화하고 이용하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서로 다른 생각과 사상들, 좌·우 노·사의 분열, 다양한 색깔과 계층들은 하나로 묶여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게임의 룰을 만든 것 아닌가? 개혁이 느릴지라도 게임의 룰을 파괴하자는 급진적인 사고는 오히려 맑스주의에 가까운 것이지 개혁주의 신앙과는 거기가 멀다. 국가에는 헌법이라는 게임의 룰이 있고 성경은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한다(롬13:1). 느리지만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고 세상을 담아내야 하는 것이 칼빈의 개혁주의 정신이다. 종교개혁 정신은 정치권력에 밀착하는 것이 아니다. 점착은 확신과 광기를 만들고 적을 바깥에만 두려는 박해불안의 속성이다. 개인구원과 복음전도만 외치다가 갑자기 반공이데올로기로 모든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겠다고 거리로 뛰어나오는 행위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어설프고 투박하게 보일 뿐이다. 정치지도자들이 불안을 달래기 위해 법사, 무당들에게 달려가는 것을 경고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한국기독교의 리더십이라면, 사람들이 기독교 진리보다 반공사상을 더 위에 놓은 권력을 유지시키고 있는 무당을 더 신뢰할 것이고 전도의 길은 막히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불안을 담고 진정시켜야 할 기독교가 오히려 사회에 불안을 던지고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언약궤를 앞세우면 전쟁에 승리할 것으로 믿었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고 언약궤마저 불레셋의 손에 넘어가는 수치를 당했음 기억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교회의 본연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